교회사학, Vol.15 (2018)
pp.127~158

DOI : 10.35135/casky.2018.15.127

18세기 말 내포 교회와 정사박해

방상근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이 글에서는 1797년에서 1799년까지 진행된 정사박해의 원인과 순교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정사박해는 1795년 이후에 지속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 급증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교세, 1790년대의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기근의 원인을 신자에게 전가하는 분위기 등이 맞물려 일어났다. 둘째, 박해의 결과 100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현재 알려진 순교자는 여덟 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정산, 덕산, 홍주, 청주, 해미에서 순교했는데, 대부분 매를 맞고 사망하였다. 셋째, 순교자들은 ‘정송과 대시’ 규정에 따라 심문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의 신자들이 신유박해 때처럼 십악(十惡)과 같은 중죄를 범한 죄인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넷째, 정사박해 순교자들은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나눔을 실천했으며, 풍부한 교리지식을 토대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순교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다섯째, 정사박해는 ‘교화주의 입장’에서 전개된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는 형벌보다는 교화를 통해 천주교를 막고자 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을 없애고 교육을 강화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정사박해 순교자들이 대부분 장사(杖死)한 것은 이러한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 때문에, 관장들이 배교를 강요하면서 고문을 강화한 결과라고 하겠다. 여섯째,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1801년 초에 신유박해가 발생했다. 신유박해는 지속적으로 표출되던 강경한 천주교 탄압론이 온건론을 이긴 결과였다. 즉 정조의 사망으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교화주의 정책’이 유지되지 못했고, 그 결과 정사박해와는 달리 ‘인기인 화기서(人其人 火其書)’의 방침이 ‘형기인 화기서(刑其人 火其書)’의 방침으로 변화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전국화·강경화 되었던 것이다.

Naepo catholic church at the end of 18th century and persecution of Jeongsa(1797)

Bang, Sang-K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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