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의도
‘기해박해’ 180주년인 2019년을 맞아 간행되는 《샤스탕 신부 서한》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신자]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주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인 샤스탕 신부를 기억하고 현양하는 기념비의 역할을 할 것이다. 동시에 서한 자료를 통해 샤스탕 신부의 사목활동과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가 가능해 질 것으로 기대한다. ‘선교사제서한 대역총서’ 제1책으로 간행되는 《샤스탕 신부 서한》를 필두로 수원교회사연구소는 앞으로도 교회사적으로 가치 있는 선교사제의 서한이나 기타 외국어 문헌, 저서 등도 번역하여 간행할 예정이다.
▲ 내용
샤스탕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로서 프랑스를 떠난 후부터 순교하는 순간까지 사목활동을 하는 선교지에서는 물론 선교지로 가는 여행 중에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나 마카오 극동대표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극동대표부로 많은 보고서를 보냈으며, 가까운 동료 선교사제나 가족, 지인에게도 많은 서한을 보냈다.
이와 같이 직접 작성한 서한들을 통해 샤스탕 신부의 사목활동과 신앙의 면모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담당하던 선교 지역의 상황과 해당 선교사제들의 활약상, 특히 1830년대 조선대목구의 사정과 1839년 박해가 진행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샤스탕 신부의 서한이 갖는 교회사적 가치는 높다. 또한 1830년대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국천주교회사와 세계교회사를 연구하는 작업에도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수원교회사연구소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수집 정리한 샤스탕 신부의 서한 육필본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에서 작업한 판독본을 바탕으로 한국천주교회와 관련된 샤스탕 신부 서한 중 중복된 서한을 제외한 총 42통을 뽑아 새로 판독하고 번역·주석했다.
▲ 목차
간행사
추천사
그림과 사진, 지도로 보는 샤스탕 신부의 삶과 죽음, 신앙
해제
일러두기
샤스탕 신부 서한 (판독·역주 대조)
부록 - 용어사전
색인
▲ 샤스탕 신부 소개
샤스탕(Chastan, 鄭, 1803~1839)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조선대목구 선교사제이며 순교성인이다. 샤스탕은 1803년 10월 7일 프랑스에서 출생했으며 1826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선교사제를 꿈꿨던 그는 1827년 1월 13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몇 달 동안의 수련 기간을 거친 후 1827년 5월 프랑스를 떠나 1828년 7월 19일에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했다. 거기서 샤스탕 신부는 조선 선교를 자원했지만 대표부의 지시에 따라 1829년 1월 페낭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페낭에 있을 때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지원하여 허락을 받았고, 1833년 5월 페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1834년 6~7월에 1차 조선 입국이 실패한 후 중국 산동 지역으로 가서 2년간 사목활동을 했다. 먼저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보낸 조선 신자들의 도움으로 1837년 1월 1일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주로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 공소를 방문하면서 사목활동을 했고, 여름에는 서울에 머물면서 모방 신부와 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를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지방에 피신해 있었고, 박해 종식을 위해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모방 신부와 함께 9월 6일 스스로 포교에게 나아가 붙잡혔다.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에 동료 선교사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후 선교사제들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동료 선교사제들, 순교한 조선신자들과 함께 시복시성 절차를 거쳐 1925년 7월 5일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에 성인이 되었다.